몇 년 전에 신영복 교수의 <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을 기세 좋게 읽기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읽을 때마다 몇 페이지도 못 가서 눈이 슬금슬금 감기는 게 도저히 진도를 낼 수가 없었지요.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전 교양인이 아닌가 봅니다. 이런 품격있는 책이 잘 듣는 수면제가 되어 버리다니....
헌데, 얼마 전 한가롭게 책장의 책들을 훑어 보는데 웬일인지 이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호오~ 그 때 그 수면제가 아니던가? 별 생각없이 책갈피를 훌훌 넘겨 보는데 눈길을 잡는 구절이 있는 겁니다.
"신목자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필진의(新浴者必振衣)" -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
아.....왠지 간지 넘칩니다!! '신목자필탄관, 신욕자필진의'라는 한자어 독음이 입에 쫙쫙 달라붙고, 뜻풀이 또한 고고한 맛이 개운하여 갑자기 입맛이 당기더군요. 중국의 고전 시가집 <초사(楚辭)>에 나오는 굴원(屈原)의 시 '어부(漁父)'의 한 구절이라지요.
그렇게 우연히도 다시 펼쳐 든 이 책을 이번에는 뿌듯한 마음으로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책인데 어째서 그때와 지금이 이리도 다르게 느껴질까 모르겠습니다. 그새 나이를 몇 살 더 먹어서인지 동양고전의 글귀들이 따분하고 갑갑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책을 통해 배우는 동양고전의 독법으로 제 자신의 모습도 비춰보고, 때로는 우리 사회의 모습도 읽어 보는 시간들이 무척 뜻깊고 재미있었습니다.
하여, 책 전체를 소개하는 글을 쓰면 더 좋겠습니만 제겐 그 내용들을 다 헤아려 소개해 드릴 능력이 없는지라, 여기에선 위에 잠시 언급했던 굴원의 시 '어부'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제게 좋은 책 인연을 이끌어 준 시인 만큼,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하여 신영복 교수의 <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 을 읽게 되는 분이 있다면 더 좋겠지요.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유명한 애국시인이었다고 합니다. 시도 시이지만 유배의 절망감으로 멱라수에 돌을 안고 몸을 던져, 오늘날 중국이 주장하는 '단오절'의 유래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부' 는 굴원이 유배 중에 쓴 작품으로 나라를 위한 고뇌와 울분을 토로한 애국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한문 교재에도 나온다고 하고, 시험문제에도 종종 등장할 정도로 잘 알려진 시라고 하는데.....그랬던가요......전혀...기억이.....orz
어부사(漁父辭) - 굴원(屈原)
屈原旣放 遊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굴원기방 유어강담 행음택반 안색초췌 형용고고
굴원이 쫓겨나 강호에서 노닐며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모습은 야위어 보였다.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於斯
어부견이문지왈 자비삼려대부여 하고지어사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굴원왈 거세개탁 아독청 중인개취 아독성 시이견방
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있는데 나만이 깨어 있으니, 이런 까닭에 쫓겨나게 되었소."
漁父曰
어부왈
어부가 말했다.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성인불응체어물 이능여세추이
성인은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수 있어야 합니다.
世人皆濁 何不淈其泥 而揚其波
세인개탁 하불굴기니 이양기파
세상 사람이 모두 탁하면 어찌하여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醨
중인개취 하불포기조이철기리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어째서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를 마시지 않으시고,
何故深思高擧 自令放爲
하고심사고거 자령방위
어찌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십니까?
屈原曰
굴원왈
굴원이 말했다.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오문지 신목자필탄관 신욕자필진의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安能以身之察察 受 物之汶汶者乎
안능이신지찰찰 수 물지문문자호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을 수 있겠소?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영부상류 장어강어지복중
차라리 상강(湘江)에 가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낼지언정
安能以晧晧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안능이호호지백 이몽세속지진애호
어찌 희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漁父莞爾而笑 鼓枻而去
어부완이이소 고예이거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간다.
乃歌曰
내가왈
이내 노래하기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될 것을!
遂去不復與言
수거불부여언
그리고는 떠나가서 다시는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다.
굴원이 유배되어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데, 어부가 다가와 유배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짜증났겠죠. 굴원은 자신의 결백과 정치적 정당성을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어부는 오히려 굴원의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를 비판하죠. 그러자, 굴원이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된다는 회심의 명대사를 날립니다. (제가 과문하여 잘 몰랐는데, 알고보니 유명한 시구더군요)
新沐者必彈冠 (신목자필탄관) 新浴者必振衣 (신욕자필진의)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오 !
아.....간지 넘치는 멘트,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는 고고한 기개가 느껴집니다.
'영부상류 장어강어지복중(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 차라리 상강(湘江)에 가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낼지언정, '안능이호호지백 이몽세속지진애호(安能以晧晧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 어찌 희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하더니, 나중엔 실제로 멱라수에 뛰어들고 말았습니다. 아....안타깝구나. 비루한 저도 언젠가 한 번쯤은 세상 앞에 나서서 호기롭게 외쳐볼 수 있을까요? 신목자필탄관(新沐者必彈冠)이요, 신욕자필진의(新浴者必振衣)라!!
그러자, 도저히 상대못 할 놈이라 여겼는지 어부가 노를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노래하며 떠나가는데, 그 노랫말이 또한 범상치 않은겁니다.
滄浪之水淸兮 (창랑지수청혜) 可以濯吾纓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 (창랑지수탁혜) 可以濯吾足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아....강호무림(江湖武林)엔 은자(隱者)가 가득하고, 와호장룡(臥虎藏龍) -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고 했던가요? 마치 어수룩한 행색의 고수가 잘난체 하는 어중잽이를 넌지시 밟아주는 듯 합니다. 아니, 그보단 소오강호(笑傲江湖) - 한바탕 주유천하(周遊天下)한 뒤에는 모든 은원을 잊고 무림을 떠나, 한 잔 술에 웃음을 담아 강호를 오만하게 비웃는다고나 할까요?
사실, 시 속의 어부는 가상의 인물이고 주고 받는 말 모두가 굴원의 자문자답인 셈이니, 이 장면은 독야청청 호기롭던 굴원이 좀 죽이고 살 걸 그랬나 하고 한 발 물러서는 내면갈등을 보여 준다고들 합니다.
하기사 '흉중의 작은 불평은 술로써 삭일 수 있으나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면 풀 수 없다 - <유몽영(幽夢影) - 청나라 장조(張潮) 지음>'고 했습니다. 세상의 큰 불평을 안고 사는 자로서 강호무림의 협객이라면 칼이라도 뽑아 들 것이나, 칼을 뽑을 용기와 힘이 없는 지식인은 세상과 타협하는 길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한들 이상과 좌절, 분노와 욕망이 얽히고 설켜 타들어가는 그 속내를 어찌 숨길 수야 있었겠습니까?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을 달래려 술을 찾지만, 술로써 삭일 수 있는 것은 흉중의 작은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했지요.
비슷한 관점에서, <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의 저자 신영복 교수는 이 시를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이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위의 시구는 이 시의 결론부가 된다고 하며,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라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음.....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갓끈을 씻고 싶은데 물이 흐리고, 맑은 물에는 발을 씻어 갓끈 씻을 물을 흐리니 문제이지, 갓끈 씻고 싶을 때는 물이 맑아지고, 발 씻고 싶을 때는 물이 흐려져 준다면야 무슨 문제일까 싶습니다. 세상일은 언제나 그처럼 뜻대로 되지 않아 문제이지 않던가요?
아니, 그러고 보니 '~싶을 때'라는 저의 욕망이 문제인가요? 욕망을 버리면 맑은 물이든 흐린 물이든 얽매이지 않고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인가요? 아아.....모르겠습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독일의 철학자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인생은 다음 두 가지로 성립된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와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
서글프게도 비루한 저에겐 아직은 칸트의 말이 더 빠르게 와닿습니다. 또한, 한숨과 함께 이런 말을 읊조릴 때도 많습니다.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하지만, 저물어 가는 황혼녘 그 언젠가는 우리도 '어부'의 마음으로 '소오강호(笑傲江湖)'를 부를 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아직은 그 날이 아닙니다. 덧없는 세상사라 한들 아직은 이 몸, 무림강호를 떠날 수가 없구나......
험한 파도에 웃음을 싣고, 물결따라 덧없이 살아온 삶
한 잔 술에 웃음을 담아, 모든 은원 깨끗이 잊고 살리라.
산천초목도 따라 웃누나,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 부질 없어라.
소슬 바람에 미소 지으며, 모든 근심 잊고 살리라.
우리네 인생은 아름다운 것, 욕심없이 어우러져 웃고 살리라.
(Daum 영화, '소오강호' 줄거리 설명 중에서)
"사람이 있는 곳에 은원(恩怨)이 있기 마련이고, 은원이 있는 곳엔 강호가 있다.”
- 영화 <소오강호> 서극(徐克)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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