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 -

 *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 중에서 지진희가 고기집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데,
다른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애인에게 해 주는 말입니다.  


  지난 주말 친구들과 대둔산 산행을 마치고 펜션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관련글 : 2009/06/29 - [잡상록(雜想錄)] - 시원한 소통, 상쾌한 삶], 마침 TV에서 <결혼 못하는 남자> 재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재밌다고 낄낄대며 장면마다 한 마디씩 던져대는 통에 귀가 먹먹했습니다. 남자들도 자리만 깔아주면 아줌마들 못지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합니다.

 
등장인물 중에서 최고의 호응을 얻은 것은 역시 지진희 캐릭터였습니다. 아마도 딱히 눈길을 사로잡는 Hot 한 여배우가 나오질 않아서이겠지요. (취소입니다. 김소은, 편의점녀, 조재희 동생역은 볼수록 괜찮군요) 특히, 제가 바로 '결혼 못하는 남자'인지라 이게 정말 남 이야기같지가 않아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쿨해 보이지만, 실상은 찌질한 독신남. 딱 제 이야기입니다. 외모와 능력치만 빼고........치명적인 차이........orz

 
퇴근때 되면 넌지시 밥친구 물색하기, 혼자서 식당 가기, 혼자서 냉동식품 위주로 밥차려 먹기, 혼자 집에서 클래식 듣기 등등, 어찌 그리 친근한 이야기들인지.

  흐흐흐, 능력있는 독신남도 찌질하게 사는 건 뭐 그리 다를거 없구나 싶어서 안도감마저 느껴집니다.
아직 싱싱한 20대 청춘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겁니다. 친구들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 싶겠지요. 하지만, 서른살이 훌쩍 넘어가 보십시요. 다들 결혼해서 회사생활이고 가정생활에 치여살기 바쁜데, 하다못해 애인 하나 없이 덩그러니 혼자 사는 그 생활이란.....

 
특히, 혼자서 식당 가는 일은 이 생활의 가장 큰 고달픔 중의 하나입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한번이라도 혼자서 식당을 찾아 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 잘 알겁니다.

  그래서, 한때는 1인 외식인구를 겨냥한 음식점을 차려볼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니 분명 수요가 있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습니다. 지금껏 그런 시장이 성립되지 않은 것은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회관념상 그런 수요가 표출될 수 없기 때문이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울면 지는 것이라 하지요. 우리나라에선 그런데서 밥먹으면 지는 겁니다. 눈치밥 먹으면서 일반 식당을 드나들지언정, 누가 볼까 두려워서 그런데 드나들 수는 없는거지요.

 
드라마에도 나왔지만 혼자서 식당 가기의 최고봉은 역시 고기집입니다. 분위기상으로나 기본 상차림상으로 보나, 고기집은 보통 담대한 심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혼자 들어가서 떡 하니 한상 차지하고 앉았기가 참 힘듭니다.

  어디 구걸하러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 돈 내고 내가 고기 사먹겠다는데 고기집 문 앞에만 서면 왜그렇게도 망설여지는지. 그냥 지나가는 척하며 안쪽을 힐끔거리다가는 이내 지나치고, 다시 되돌아와서는 그냥 또 지나치곤 하지요. 어쩌다 손님이 없는 집을 발견하고는 그래도 좀 덜 무안하겠다 싶어 들어가 보면, 아직 장사 준비 안 됐는데요....흑......orz

 
그러던 어느날, 전 오랫동안 준비해온 그 일을 드디어 결행하였습니다. 며칠간 사전 정찰을 통해 시도해 볼만 하다고 점찍어둔 동네 삼겹살집에 눈 딱감고 들어간 것이죠. 역시나, 혼자서 밥 먹는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어김없이 들려옵니다.

'혼자세요?' (이런 건 나라에서 법적으로 규제해야 합니다. 습관적인 손님맞이 인사라고 하기엔 차별적 늬앙스가 너무 강합니다)
'네, 삼겹살 2인분이요.'

 
1인분 시킬까봐 저쪽에서 걱정하기 전에 알아서 먼저 선방을 날려줍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글지글 고기굽는 소리에 즐거운 이야기 소리들이 화기애애합니다. 음....이럴 땐 그저 조용히 신문을 보는척 보는게 제일이지요. 한번씩 괜히 문자라도 온마냥 휴대폰을 꺼내어 확인해 보기도 합니다.

 
상이 차려지고 불판이 올려지면 그래도 집중할 일이 있어서 좋습니다. 서둘러 고기를 불판에 올리려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서빙을 해주던 아가씨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곂에 앉아서는 고기를 구워주기 시작하는 게 아닙니까? 여기가 무슨 고급 한식당도 아니고 동네 삼겹살집에서 이 무슨 황송한 일인지....게다가 손님이 저 뿐인 것도 아닌데다, 홀에서 서빙보는 사람은 그 아가씨 혼자입니다.

 
아무말 없이 차분히 고기를 굽는 그 아가씨의 얼굴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나무꾼에게 고기를 구워주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순간, 주변의 세상이 모두 정지하고 블랙 아웃하는데, 오직 저와 그 아가씨만 환한 빛 아래서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말없이 고기를 굽고, 저도 말없이 고기를 먹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빗줄기를 타고  따뜻한 무엇인가가 고소한 고기냄새를 타고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지글지글 고기굽는 소리와 함께 시간은 말없이 흘러만 가고 있었습니다.

 
눈치없는 다른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통에 그 아가씨는 내내 제 옆에 앉아 고기를 구워 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을 보고는 이내 돌아와 제 옆에서 정성껏 고기를 구워 주었지요. 관찰해 보니 다른 테이블에서는 고기를 구워 주지 않더군요. 내 여자가 내 앞에서는 한없이 상냥한 미소를 짓더라도 다른 남자들 앞에서는 냉담한 표정을 지을 때, 그 흐뭇한 기분이 이와 같을까요? 저에게만 충실한 그 아가씨의 모습에 괜히 우쭐해지고 감격했습니다.

 
그 후로도 그 집을 몇 번 더 찾아가 보았지만 다시는 그 아가씨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대충 파악한 바로는 그 아가씨는 주인 아주머니 따님인 것 같았고, 그 때는 잠시 일을 도와주던 때였나 봅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고기집은 망했습니다. 설비들이 철거된 고기집 안을 들여다 보면서 제 마음까지도 휑해지던 그 때가 생각납니다.

 
지금와서 다시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아가씨가 특별히 예쁜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수수하게 정감 가는 얼굴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제가 떠올렸던 그 모든 이미지는 저 혼자만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가씨는 그저 퇴근시간에 혼자서 고기 구워 먹으러 들어온 젊은 남자의 꼬라지가 하도 처량해 보여서, 잠시 적선을 베푼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제게 있어 꿈꾸듯 고기를 구워 먹어본 기억은 그때 이후로 다시는 없었으니까요. 또한, 제 곁에 선녀가 강림한 듯한 느낌을 주는 여자도 다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제 마음속에서 그녀는 동네 담배가게 아가씨요, 꽃집 아가씨와 같은
영원한 순수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 요즘도 어쩌다 혼자서 고기집을 들어설 때면 첫사랑 추억처럼 아련히 그때 그 그림이 떠오르곤 합니다. 혼자서 고기집을 헤매는 사자나 늑대의 삶에도 애틋한 추억 하나쯤은 있는 법입니다. 또는, 그런 추억을 애타게 갈구하는 법이지요.

여성 여러분,
혹시 주위 고기집에서 그들을 발견하면 말없이 고기를 구워
주십시요.
그 순간 당신은 여신이 될 것입니다.

 

 


 고기 구워 주세요....

 

그때 이후로 전 고기집에서 여자가 고기 구워주는 걸 대단히 민감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음, 여자가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술을 따라주지 않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이런저런 일로 여자분(들)과 고기집에서 자리를 같이 할 때, 저와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도 여자분이 고기를 구워 주시면 왠지 마음이 불편합니다. 지금 제게 프로포즈하시는 거에요?  나중에 제게도 여자가 생긴다면 제 여자는 외간남자에게 절대로 고기를 구워주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휴.....이러니 제가 여자가 없는 겁니다. 결혼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Posted by 즐거운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