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1990년대초로 마침 교복 재도입이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이야 교복이 일반화되었지만 의외로 그때는 그렇지 않았지요. 아무튼,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교복 도입 논의가 일었고, 우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이었습니다. 뭐, 거창하게 '자유의 박탈'이라는 상징적 의미까진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교복을 입으면 왠지 '멋'을 박탈당할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싫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슬픈 스포츠머리 무스질에, 원색 찬란한 골프 티셔츠, 통바지에 좁은 밑단, 둔탁한 나이키 에어 농구화 따위의 유치한 멋이 기껏이었지만, 나름대로 그땐 그게 진지한 멋내기였습니다.
다행히 우리 고등학교는 제가 졸업을 하고 난 뒤에야 교복을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교복'을 입게 된 것은 군대에서,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입니다. 군대에서야 그렇다치고, 정말이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렇게나 '교복'만 입게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엔 오히려 늘 수트를 입을 수 있다는 게 근사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근사해 보이던 수트가 입다보면 결국 '교복'이 되고 말더군요. 만날 거기서 거기입니다.
남자들 수트란 게 참 그렇습니다.
한국처럼 보수적인 직장패션문화에서는 디자인이나 컬러가 천편일률적입니다. 물론, 그 속에서도 차별화가 가능합니다. 엄청 비싼 돈을 지불하면 그 디자인에 그 컬러인데도 확실히 다릅니다. 야, 이래서 명품들을 찾는구나 싶어지지요. 그런데, 비싼 게 좋은 줄 누가 모릅니까? 지갑이 문제이지. 결국 우리는 단조롭고 지루한 '교복'을 매일 입고 다니게 됩니다. 출퇴근길 주위를 둘러보면 같은 학교 학생들인양 같은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지나갑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이렇게 많았나.....
그래도 우리에겐 주말이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교복을 벗어 던지고 다양한 사복을 입고서 저마다의 개성을 뽐낼 수 있는 기회이지요. 멋진 핏의 청바지도 입어 볼 수 있고, 세련된 치노바지로 멋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같은 셔츠라도 와이셔츠와는 또다른 멋의 노타이 셔츠에, 같은 재킷이라도 정장과는 또다른 느낌의 블레이저를 입어볼 수도 있습니다. 아, 여기에다 만날 신던 구두가 아니라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컨버스화를 신어주는 센스를 발휘할 수도 있지요. 이야, 생각만 해도 멋집니다.
그런데, 깜빡한 게 있습니다. 전 비루한 독신남이거든요.
저렇게 차려입는들 누가 있어 만나러 나가겠습니까? 어느듯 친구들은 자기 일에 어린 새끼들 키우고 가정을 꾸리느라 다들 바쁘다 보니 총각 시절처럼 아무때나 만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일찍부터 인간관계가 여성계와는 인연이 없었던지라, 여자친구는커녕 주위에 밥친구할 여자후배나 기타 여성(female)이란 성(gender)을 가진 인류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결국, 주말엔 집에서 뒹굴뒹굴. 사복 입고 나갈 일도, 변변한 사복도 없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쇼핑을 다녀왔습니다.
문득 드는 생각에, 갑자기 여자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뭘 입고 나가나 싶었거든요. 참, 걱정도 팔자지요. 에라이.... 어쨌든,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길을 나섰습니다. 길거리엔 멋진 스타일의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그 속에서 전 어색한 사복차림으로 왠지 주눅이 들고 있었습니다.
'그래, 나도 곧 멋진 사복을 사입으면 전혀 꿀릴 게 없을거야. 자신감을 가지라고.'
그런데.....여기저기 들러서 입어보는 옷마다 어찌 그리 안어울립니까.
아...촌티. 옷도 제가 촌놈인 걸 알아보는가 봅니다. 상처입은 마음으로 이곳 저곳을 헤매던 저는 남성 정장샵을 들렀습니다. 거기서도 캐쥬얼 스타일을 입어보던 저는 문득 디스플레이된 정장을 한번 걸쳐보고 싶었습니다. 와우~! 거울을 보니 멋진 수트빨의 비즈니스맨이 서 있는 게 아닙니까? 좀전의 촌놈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교복'이 제게 이렇게 잘 어울리는 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좀전까지 사복을 입어볼 때는 남의 옷을 '걸친'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내 옷을 '입은' 느낌입니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제 손엔 사복이 아닌 정장 한 벌과 와이셔츠, 넥타이가 들려있었습니다.
교복 한 벌 더 늘었군.... orz 집으로 돌아와 늘 입는 츄리닝으로 갈아 입은 저는 새삼 거울을 한번 바라보았습니다. 와우~!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우리 중고등학교 체육선생님들의 근무복이었던 츄리닝빨도 이만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츄리닝빨의 재발견이었습니다. 츄리닝을 입고 동네 이마트로 장을 보러 나갔습니다. 장을 보는 내내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보라구들, 나의 이 츄리닝빨을!
결론입니다. 비루한 독신남에겐 사복 패션이란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안 어울린 것인지, 안 입다보니 안 어울리게 된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늘 입는 '교복'과 츄리닝은 무척 어울립니다.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는 혹시라도 여자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정장에 넥타이를 메고 나가든지, 츄리닝을 입고 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왠지 둘다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전 지금이 속편합니다.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거든요. 만날 입는 정장과 츄리닝이 잘 어울리는 것처럼, '비루한 독신남'이 제게는 잘 어울립니다. 그럴 거에요..................
갑자기 1년 넘게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나는군요.
깊은 가을 밤입니다.
저의 츄리닝빨, 이 정돈 되지 않을까 싶어요.....ㅎㅎㅎ
'독수공방 찌질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난언야(難言也)라, 말로 하기 어렵습니다. (0) | 2009/12/10 |
|---|---|
| 구첩 - 서른 다섯 독수공방, 먼 길에 시간을 때우는 한 방법 (7) | 2009/11/08 |
| 비루한 독신남의 패션 이야기 (10) | 2009/10/26 |
| 총 맞은 것처럼 (3) | 2009/09/07 |
| 독신남의 일요일 일기 (2009년 8월 9일, 아마도 흐렸던 듯) (7) | 2009/08/11 |
| 감동이 출렁이는 신인 여배우 (6) | 2009/08/0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