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티브 잡스의 신의 교섭력>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잡스에 관해서는 이미 몇 권의 책을 읽은 적이 있어 전반적인 책의 내용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관되게 잡스의 배짱과 뻔뻔함에 초점을 맞춘 책의 구성은 그럭저럭 재미있었습니다. 잡스의 매력으론 애플의 슬로건인 Think Different 로 대표되는 창조성과 뻔하거나 지루하지 않는 재미와 역동성 등을 들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배짱과 뻔뻔함이야말로 가장 멋지고 부러운 잡스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가지지 못한 점이자 가장 갖고 싶어하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배짱과 뻔뻔함이 참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저는 업무경력상 협상의 자리에 비교적 많이 앉은 편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협상의 자리에서 그 특유의 배짱과 뻔뻔함으로 신의 교섭력을 발휘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교섭력을 겨우 겨우 발휘하는 저야 협상을 마무리하고 나면 항상 아쉬움이 더 많이 남습니다. 좀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을텐데. 대담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를 한두번이 아닙니다. 왜 좀 더 태연하게 배짱을 부리지 못했을까? 왜 그때 잠시 얼굴에 철판깔고 뻔뻔해지지 못했을까? 그랬다면.........휴......인정하기 싫지만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이 차라리 제겐 더 가까운 듯합니다.
어릴 때도 그랬습니다.
우리 동네 꼬마들에겐 동네 대학 캠퍼스와 운동장이 놀이터였습니다. 그리고 어린 우리들에겐 스머프를 괴롭히는 '가가멜'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대학 수위분들이었습니다. (죄송^^) 우리가 대학 캠퍼스 여기저기서 한참 놀고 있을 때면 꼭 수위들이 쫗아와 우리를 내쫓곤 하였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대학 캠퍼스 곳곳에서 수위들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했습니다.
건물 모퉁이나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빼꼼히 내다보면 저 멀리 수위가 우리를 찾느라 두리번 거리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긴장감. 그대로 숨어 있을지, 수위가 잠시 다른 곳을 보는 순간 재빨리 다음 은폐물로 이동할 지 결정해야 합니다. 조마조마함이 극에 달하려는 어느 순간, '지금이닷!' 싶은 때조차도 저의 몸은 튀어나가기 보다는 한심하게도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나가다가 들키면 어쩌지...' 주저하는 마음이 발을 붙잡은 거지요. 결국 아무 행동도 못하고 내내 그 자리에 숨어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론 그 덕에 수위에게 들키지 않았을 때가 좀 더 많았던 것 같지만, 그때마다 안도감 뒤에는 씁쓸한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 맛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인 걸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 맛이 꽤 씁쓸했나 봅니다.
그런데, 저라고 언제나 소심한 일화들만 계속되었겠습니까?
때로는 '시스템 에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배짱좋은 짓도 한번씩 하곤 했습니다.
대학시절 잠시 바둑에 관심을 둔 적이 있습니다.
바둑 입문책을 휘리릭 한번 훑어 보고 친구와 재미삼아 몇번 둬본 것이 전부, 곧바로 학교 앞 큰 기원을 찾아 갔습니다. 기원문을 호기롭게 열고 들어가 기원 주인에게 말하기를, 바둑 한판 두러 왔으니 적당한 상대가 있으면 소개시켜 주시라 하였습니다. 순간,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바둑을 두고 있던 주위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일순 저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묘한 긴장감. 마치 방랑 무사의 '도장 깨기' 한 장면이 시작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 바로 이 배짱이야!!! 하지만......현실은 냉혹한지라 그 다음부터는 쪽팔림의 연속입니다.
- 몇 급이나 두시나요?
- 예? 뭐, 한...10급 정도 될 겁니다. (사실은 10급은커녕 18급이 제 실력이지요. 바둑에선 18급이 최하급입니다)
- 10급이요!!?? (환청인지 실제였는지 아무튼 주인과 주위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들렸던 것 같습니다)
음...저기 저 분이 7급이니 돌 좀 깔고 둬 보세요.
뭐, 결과는 새삼 소개해 드릴 것도 없습니다.
중반쯤 되자 상대방은 아예 옆 자리 바둑감상에 집중하며 건성으로 두던 걸요. 그게 더 오기가 생겨서 당연히 중간에 돈을 던졌어야 할 바둑을 끝까지 두고야 말았습니다. 상대방은 짜증 대폭발이더군요. ^^ 그래도, 쪽팔림은 아는지라 서둘러 계산을 치르고 기원문을 도망치듯 나서려는데, 뒤에서 기원 주인이 제게 한 마디 하십니다.
- 학생~ 다음부턴 그냥 바둑 배우러 왔다고 말해~~~
지금 생각해도 무슨 배짱으로 그 기원문을 열고 들어가 그런 말과 그런 행동을 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무대뽀 배짱이 참 그립고 아쉽습니다. 특히나, 오늘 같은 주말, 독수공방하고 있는 비루한 제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배짱과 뻔뻔함이 가장 아쉬울 때는 여자 앞에서이거든요. 제가 지금껏 이 모양 이 꼴인 가장 큰 이유는 여자 앞에서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해요.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나갈까 말까 조마조마해 하는 꼬마처럼 말입니다. 불쑥 뛰어나갈 수 있는 용기와 배짱, 아........orz
제가 워낙 배짱과 뻔뻔함에 배고파서일까요?
전 스티브 잡스의 배짱과 뻔뻔함이 종종 도를 지나쳐 세상의 비판을 받는다 해도 그 뻔뻔함이 좋습니다. 저도 그 욕 좀 먹어봤으면 좋겠으니, 제발 좀 그렇게 배짱좋고 뻔뻔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수애에게 배짱좋게 '봐라, 가시나야. 내 한번 만나볼끼가?' 라고 말하곤,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왠지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얼큰한 해장국처럼.
배짱! 제게 있어서는 일과 사랑을 모두 가져다 줄 마법의 음식입니다.
배고파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러니까 내가 십대였을 때 말이야, 여자친구 아빠들이 날 좋아하시지 않더라고.
그때 이후로 난 여자를 만나도 그 아빠들은 만나지 않아. 훗~
병맛스럽지만 왠지 부러운 저 대사
저도 '아빠들이 싫어하는' 이런 뻔뻔한 놈이 되어 보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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