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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본가에는 시커먼 잡종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부모가 각각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마르노이즈'로 나름 명가의 혈통을 이었지만 막상 섞어놓고 보니 생긴 것이 대략 난감하더라는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처음 이 놈을 만났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런 저런 일로 한참을 시골 본가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금요일 저녁 외근을 마치고 들어오던 길에 불쑥 마음이 동하여 그 길로 차를 몰고 시골 본가로 내달렸습니다. 늦은 밤 시골집 문을 들어서는데 문득 어둠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순간 늦은 밤 조용한 시골 마을이 다 울리도록 컹컹 대며 무섭게 짖어대는 놈과 마주쳤습니다. 시커먼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시커멓게 커다란 그 무엇.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그 형체.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나오는 개얼굴과 같은 불길한 인상. 한 쪽 귀만 접혀진 기묘한 생김새까지. 저 어둠 너머 악마의 세계에서 어둠의 장막을 찢고 이 세계로 넘어 온 악마의 개. 이것이 이 놈의 첫 인상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이 놈은 제가 시골집을 찾아 갈 때마다 요란하게 짖어대며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전 이 놈과 친해지기 위해 시골 개들이 먹어 보지 못하는 각종 애견식품을 사다 주곤 하였지요. 고급 목줄과 개줄도 사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놈을 직접 만지며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지금껏 집에서 키우는 개들과는 금새 친해지곤 하던 저였지만 이 놈은 왠지 주저하게 되더군요. 솔직히 만지면 물지나 않을까 살짝 겁도 났었습니다. 하지만, 조심조심 이 놈을 처음 만지던 날, 우린 서로가 참 행복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제 손길을 가만히 받아주던 이 녀석. 이내 제 품을 파고들더군요. 그 커다란 녀석이. 알고보니 새끼 때부터 아버지가 품에 꼭 안아 주던 걸 무척 좋아해서 커서도 아버지가 녀석을 쓰다듬어 줄 때면 품을 파고들곤 한다더군요. 답지않게시리. 나중엔 배를 슬슬 긁어주니 아예 배를 까놓고 드러누워서는 두 눈을 감고 한 쪽 다리를 달달 떨며 즐기기까지 합니다. 하, 고놈 참.

그날 이후로도 제가 시골집을 찾아가면 이 놈은 여전히 저를 향해 요란하게 짖어댑니다.
하지만, 대사가 다릅니다. '누구냐, 넌?' 이 아니라 '왜 이제야 오셨어요, 빨리 와서 놀아주세요'란 걸 통역해 주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가가면 이 놈은 가만히 앉아서 저를 올려다 보곤 하는데 뒤에선 뭉게뭉게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빛의 속도로 맹렬하게 흔들어 대는 꼬리. 한 자루 빗자루가 되어 마른 땅바닥을 쓸어대니 저 옛날 장판교에서 장비가 몇 안되는 부하들의 말 꼬리에 나뭇가지를 매달아 먼지구름을 일으켜 조조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고사가 바로 이와 같을까 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전심을 다하는 이 마음. 언제부터인가 감동이란 걸 좀처럼 접하지 못한 메마른 삶이었으나, 이 놈 덕분에 뜨겁게 울컥하는 감동의 그 맛을 오랜만에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제가 시골집을 찾을 때면 이 녀석의 광속 꼬리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꼬리를 흔듭니다. 녀석의 마음이 100% 전해집니다. 예전에 본가에서 키우던 개들 중에는 대가리 좀 굵어지고 나면 맛있는 것을 줄 때만 혼심의 힘을 다하고 평소에는 빼딱하게 앉아서 설렁설렁 형식적인 꼬리질을 하는 놈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 녀석은 그런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심 덩어리'입니다. 참 멋진 놈입니다.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의 개인 줄 알았더니, 악마의 실수로 변치 않는 진심만 가득 품고 태어나 지옥에서 쫓겨난 녀석이었던가 봅니다. 처음에 녀석의 외모만 보고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집니다. 매 순간 혼신을 다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변함없는 진심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얼마 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일상의 마법에 걸려든 제 모습을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마법에 걸린 와중에도 불현듯 녀석의 꼬리질이 떠올랐습니다. 매순간 혼신의 힘을 다해 진심을 전하는 녀석을 떠올린 순간 저는 마법에서 깨어났습니다. 고맙다, 로보야. [ 관련글 : 2009/10/12 - [좋은 글과의 수상한 만남] - 일상의 마법, 그 무시무시한 저주]



'날이 많이 춥다. 내 보고 싶다고 밖에 나와 있지 말고 따듯하게 집에 들어가 있거라. 조만간 한 번 내려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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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즐거운 사자